총균쇠를 읽다가 비트코인이 떠올랐다

『총균쇠』를 처음 읽었을 때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건, 거대한 문명의 흥망이 아니라 작은 식물 종자 하나의 운명이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메소포타미아 일대)에서 한번 잘 개량된 밀과 보리가 등장한 순간, 인류는 그것을 들고 유라시아 대륙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 사이, 다른 지역의 야생 후보 작물들은 — 사실은 제법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 개발이 멈추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미 충분히 좋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짧은 문장을 곱씹다가, 어느 날 비트코인이 떠올랐다. 지금부터 그 연결을 풀어보려고 한다.


1. 총균쇠가 풀어준 미스터리 — 왜 어떤 작물만 살아남았나

『총균쇠』의 큰 질문 중 하나는 이거였다. 왜 유라시아 사람들이 다른 대륙을 정복했고, 그 반대가 아니었나? 다이아몬드는 그 출발점을 환경과 작물·가축의 분포에서 찾는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야생 상태에서 인간의 식량으로 쓸 만한 풀씨앗(밀, 보리 등)이 우연히 모여 있던 지역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길들이는 데 성공했고, 수천 년에 걸쳐 알이 굵어지고 수확하기 쉬워졌다.

그러면 다른 지역, 예를 들어 아메리카 대륙이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는 식량 작물이 없었느냐 — 그건 아니다. 야생 후보 종은 분명히 있었다. 다만 개량되지 않았다. 왜?

여기에서 다이아몬드는 흥미로운 관찰을 던진다. 농경이 한 곳에서 시작되어 충분히 좋은 결과를 내면, 그 작물이 무역과 이주를 따라 다른 지역으로 통째로 흘러간다. 새로 도착한 지역에서는 굳이 자기 동네의 야생 풀을 수천 년에 걸쳐 개량할 이유가 없다. 이미 알이 굵고 잘 자라는 종자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다른 야생 후보 종들은 도태된다. 더 정확히는, 개발되지 않는다.

이 결론이 머릿속에 박힌다. 선점한 한 종이 도미넌스(지배력)를 차지하고, 나머지 후보는 영영 무대에 오르지 못한다.


2. “이미 충분히 좋다” — 진화를 멈추게 하는 결정적 신호

이 패턴의 핵심은 의외로 단순하다. 사람들은 합리적이다. 이미 충분히 좋은 게 있으면, 비슷한 후보를 굳이 처음부터 다시 만들지 않는다. 시간도, 에너지도, 자원도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걸 거꾸로 말하면 — 도미넌트한 한 가지가 자리를 잡는 순간, 그 자리에 대한 도전은 점점 더 비용이 비싸진다. 후발 주자는 단지 같은 수준에 도달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미 형성된 사용자 기반·지식·생태계를 뒤집을 만큼 압도적으로 더 좋아야 하는데, 그러기엔 자원이 따라주지 않는다.

이 메커니즘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다른 이름이 있다. 바로 네트워크 효과다.


3. 네트워크 효과로 일반화하기

네트워크 효과(network effect)는 보통 SNS, 메신저, 결제 시스템을 설명할 때 쓴다. 카카오톡이 한국에서 다른 메신저를 압도하는 이유, 페이스북이 한때 거의 모든 SNS를 빨아들였던 이유, 윈도우 OS가 수십 년간 자리를 지키는 이유 — 모두 같은 원리다.

참여자가 늘어날수록 그 가치가 더 커지고, 늘어난 가치가 다시 참여자를 끌어들이는 자기 강화 루프.

그런데 『총균쇠』의 작물화 이야기는 우리에게 한 가지를 더 알려준다. 네트워크 효과는 단지 도미넌트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후보가 아예 개발되지 않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이다. “2등이 1등을 못 따라잡는” 게임이 아니라, 2등이 시작도 못 하는 게임이다.

작물화의 사례에서 야생 풀씨앗들은 분명 가능성이 있었지만, 누구도 그 가능성에 베팅하지 않았다. 그건 야생 풀의 잘못이 아니라, 시스템의 결정이었다.

이 결론을 머리에 새기고 다시 비트코인을 보자.


4. 비트코인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비트코인은 디지털 희소성을 가진 최초의 자산이다. 발행량은 2,100만 개로 고정되어 있고, 누구도 인위적으로 늘릴 수 없다. 중앙 발행자가 없고, 자기 보관(셀프 커스터디)이 가능하다. 수십 년 동안 보관 비용 없이 가치를 저장할 수 있는 기술 — 그래서 나는 비트코인을 투자 자산이라기보다 가치 보존 기술로 본다.

여기서부터 작물화 비유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첫째, 비트코인은 “잘 길러진 종자”의 자리에 있다. 15년 가까이 한 번도 멈춘 적 없이 블록을 생성해 왔고, 가장 많은 검증자(채굴자)와 가장 많은 보유자, 가장 두꺼운 인프라(거래소, 지갑, 결제 게이트웨이, ETF)를 가지고 있다. 처음부터 이렇게 컸던 게 아니라, 작은 풀씨앗이 알이 굵어진 것처럼 수많은 시도와 검증 끝에 도달한 상태다.

둘째, 다른 야생 후보 — 수많은 알트코인들이 등장했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비트코인이라는 “이미 충분히 좋은” 도미넌트가 디지털 희소 자산이라는 자리를 차지한 이상, 다른 야생 종이 그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은 시간이 갈수록 줄어든다. 새 코인이 비트코인을 이기려면 “조금 더 좋은” 정도로는 부족하고, 누적된 신뢰·인프라·사용자 기반을 뒤집을 만큼 압도적이어야 한다.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셋째, 이 자리에 후발 주자가 “개발되지 않는다.” 인간이든 자본이든, 합리적이라면 이미 도미넌트가 자리 잡은 영역에 자원을 쏟지 않는다. 디지털 희소 자산의 자리는 이미 비트코인이 차지하고 있고, 그 사실을 인지한 사람들은 다른 곳에 자원을 쏟거나 — 비트코인의 생태계 위에 무언가를 짓는다.

작물화 비유로 다시 정리하면, 비트코인은 디지털 통화 세계의 밀이다. 다른 후보들은 야생 풀로 남고, 다음 천 년 동안 굳이 작물화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5. 왜 비트코인 보유자는 끝까지 팔지 않는가

도미넌트는 시간이 갈수록 자리를 굳힌다. 즉, 비트코인은 시간이 흐를수록 약해지는 게 아니라 강해진다. 사용자가 한 명 늘 때마다 네트워크의 가치가 약간 더 커지고, 인프라가 한 단계 더 두꺼워지고, 다음 도전자의 진입장벽이 그만큼 더 높아진다.

그래서 “팔지 않는다”는 결정은 단순한 인내심의 문제가 아니라, 네트워크 효과의 수혜자로 남기로 한 선택이다. 비유하자면 — 배가 건조되고 해양에 나가 수백 마리의 물고기를 잡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스폰서가 되기로 한 것이다.

시간 선호의 언어로 다시 말하면, 보유자는 즉시 보상을 잡으려는 높은 시간 선호 대신 낮은 시간 선호를 선택한 사람이다. 작은 변동에 흔들려 파는 사람과, 사이클 끝까지 들고 가는 사람의 차이는 결국 이 한 가지에서 갈린다.


마무리 — 도미넌스가 자리 잡는 순간, 게임은 단순해진다

『총균쇠』의 작물화 비유가 알려주는 가장 강한 교훈은 이거다.

도미넌트가 자리를 잡으면, 후보의 가능성은 사라진다. 단지 약해지는 게 아니라 시작조차 못 한다.

비트코인이 디지털 희소 자산이라는 자리를 차지한 이상, 거기에 도전하는 것은 합리적인 자원 배분이 아니다. 반대로 그 자리의 수혜자로 남는 것 — 즉 비트코인을 보유하고 팔지 않는 것은 네트워크 효과의 흐름을 따르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강한 전략이다.

비트코인 글을 가끔 받아보고 싶다면

새 글과 생각을 뉴스레터로 보내드립니다.

뉴스레터 구독하기

Similar Posts

  • 알지 알트코인 너무 재밌지

    비트코인과 알트코인이 무엇인지 구분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때문에 설명한다. 비트코인(Bitcoin, BTC)를 제외한 모든 코인을 알트코인이라고 부른다. 비트코인은 오직 하나이며, 나머지는 모두 알트 코인이다. 심지어 비트코인 캐시처럼 비트코인이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어도 비트코인이 아니다. 물은 H2O이며, 나머지는 모두 물이 아니다. 금은 오직 금 하나이며(화학기호 Au) 나머지는 아무리 반짝이고 노랗더라도 금이 아니다. 알트코인=카지노=튤립 알트코인은 카지노와 같다. 딸 수도 있고…

  • 수수료를 너무 적게 넣었어요. 이거 언제 전송 될까요?

    📌 비트코인 셀프커스터디 완벽 가이드 보기 “제가 전송 수수료 좀 아낀다고, 너무 적은 수수료로 보냈어요. 그래서 그런지 컨펌이 계속 안나고 있습니다…이거 언제쯤 전송 되나요?” 사실, 저도 그런적이 많았어요. 전송이 되기야 되지만 기다리는 동안 정신 에너지 소모가 크더군요 ㅎㅎ 그래서 언제… 거래(Transaction)는 Mempool에 머물다가 수수료율 시세가 충분히 낮아지면 그때 포함 됩니다. (트랜잭션 만들때 설정한 수수료율이 2…

  • 비트코인 셀프 커스터디는 어려울까?

    자, 앞에서 셀프커스터디의 장점에 대해 알아보긴 했는데.. 내가 할 수 있을지… 너무 어려운건 아닌지 걱정돼? 그래 그럴 수 있지. 근데 생각보다 별로 안어려워. 그러니까 일단 그냥 해봐. 비트코인은 직접 써봐야 돼. 그래야 진정한 가치를 느낄 수가 있거든! 😊✨ 곱창 좋아하니? 난 엄청 좋아하거든.그거랑 마찬가지야. 먹기 전까지는 그 가치를 몰라. ㅋㅋㅋㅋ 셀커가 어려워 보이는 이유 일단…

  • 비트코인의 특성을 보여주는 다이어그램

    내가 팔로잉하는 Adam Back이 트위터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오호.. 비트코인이 가지고 있는 포지션을 간단하면서도 정확하게 잘 표현했다. 위 특성들을 한문장으로 요약해 보자면.. 비트코인은 가치의 저장(금)과 교환(결제)이 가능하며, 기술로 개인의 주권을 (암호화 기술로) 지켜주는 시스템이다. 비트코인 글을 가끔 받아보고 싶다면 새 글과 생각을 뉴스레터로 보내드립니다. 뉴스레터 구독하기

  • Priceless

    비트코인을 접하고 난 뒤로 소비에 대한 생각이 다소 바뀌었다. 지금은 예전에 라면 지불하기 주저했을 만한 것들을 기꺼이 지불한다. 부자라서 그런게 아니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더 아끼려고 하는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들어볼래? 좋은게 제일 싸다 제일 싼 물건이나 가성비를 찾으려 하는 대신, 필요한 ‘기능을 잘 수행하는’ ‘오래쓸 수 있는’ 좋은 물건을 사려고 한다. 결국 그게 제일…

  • 비트코인이 채굴 보상이 6.25 일때 의미

    내가 만약 현재 6.25비트코인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이것의 의미는. 전세계 비트코인을 채굴하는데 쓰이는 전기량의 10분 치를 내가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반 감기에는 채굴량이 절반으로 줄어들기 때문에, 20분 치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 반감기는 40분.그 다음 반감기에는 80분이다. 전세계 체굴자들이 10분 동안 전력을 다해 비트코인 보상을 찾기 위해…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